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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귀고리

윤의사 2022. 9. 27. 20:20

요즈음에 남자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 중에 귀걸이를 달고 텔레비전에 출연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가수가 임진왜란 이전에 살았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귀걸이를 달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남자들도 귀걸이를 달았기 때문이다.

귀걸이는 귀에 거는 장신구의 총칭으로, 이식(耳飾), 이당(耳璫), 이환(耳環)이라고도 한다.

원시시대에는 남녀가 모두 사용했으며, 주술적인 역할을 하거나 같은 종족을 표시하거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차 장식품으로 바뀌어 갔다.

우리나라 귀걸이의 양식은 낙랑의 이당에서 비롯되어 고구려를 통해 한국화되고 신라에서 발전,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귀걸이는 귀에 닿는 접이(接耳)와 밑으로 늘어지는 수식(垂飾)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접이의 굵고 가는 것에 따라 태환(太鐶)과 세환(細鐶)으로 구별되며, 수식은 그 모양에 따라 평면형, 입체형, 혼형 등으로 구분된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귀걸이는 그 모양이 매우 다양하다. 가장 화려한 것으로 국보 제 90호인 경주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제태환이식(金製太鐶耳飾)’을 꼽는다. 이 귀걸이는 굵은 태환식 주환(主環)과 타원형 유환(遊環)을 끼우고, 그 아래에 조그만 나뭇잎과 펜촉 모양의 장식품을 달았다. 주환과 유환 표면에는 귀갑형(龜甲形:거북이 등딱지 모양과 비슷한 육각형)과 삼화형(三花形)을 정교하게 세공해 장식했다.

무령왕 귀걸이
신라의 귀걸이

이와같은 귀걸이는 남녀 모두 착용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생활 양식을 따르게 되어 귀걸이를 다는 풍속이 유행하기 않았다.

오랑캐 풍습이라 하여 귀걸이를 강력하게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선조(재위:15671608)는 귀걸이를 즐기는 풍습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풍문을 듣자,

15729월에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로부터 받았으며, 감히 훼상하지 않는게 효의 시초라 하였는데,

우리 대소 남아가 귀를 뚫고 이환을 만들어 걸고 있다니지금부터 이와같은 습관을 없애도록 하라.”

 

이후 남자들은 귀걸이를 하지 않았으며, 여자들도 귀를 뚫어 거는 고리가 아닌 걸이를 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 유행이 없어졌다가 조선말기에 이르러 상류층의 여자들이 의식이나

혼례 때에 착용하면서 서서히 부활했다.

서양에서는 귀걸이를 달면 시력이 회복된다는 말이 있으며, 또 옛날에는 뱃사공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는 액막이로도 귀걸이를 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력 회복이나 익사 방지의 액막이로서의 효과를 보려면 귀에 구멍을 뚫어야 하였다. 귀걸이는 귀에 거는 장신구의 총칭으로, 이식(耳飾), 이당(耳璫), 이환(耳環)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