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의주길

의주로 가는 첫 관문 벽제관

윤의사 2021. 7. 17. 11:28

<선조실록> 25년(1592) 4월 30일의 기사에

 

"새벽에 임금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사람과 말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에서 먹는데 임금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이 없었다."

 

선조가 왜군의 침입으로 1차로 평양으로 피난을 가면서 점심을 먹은 곳이 벽제관이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 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碧蹄館址)'는

파주, 양주, 고양 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며,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 관리들이 평안도나 중국으로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도, 관서대로)의

중심 건물이 벽제관이다.

중국 사신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예를 갖추고 서울로 들어가는 곳이 관례였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이 왜군과 싸워 패한 곳이다.

그리하여 이여송 장군이 이곳에 있던 바위에 칼을 갈면서 뒷날을 도모하였다고 하여

'숯돌고개'라 불리는 곳도 있다.

현재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에 세워졌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터만 남아있다.

의주길의 시작인 삼송역앞 표지판
벽제관터
벽제천
김지남은 훌륭한 역관이기도 했지만, 청나라와의 국경 문제를 해결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숙종 대에 백두산 인근의 국경을 두고 청나라와 외교 문제가 불거지자 김지남은 조선을 대표하여 청나라의 사신과 담판을 지어 국경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때 세워진 비석이 바로 ‘백두산 정계비’이다. 또한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과 함께 지은 ‘통문관지’는 이후의 역관들에게 지침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이곳 의주길 옆에 무덤을 쓴 것도, 이 길을 지나다니는 역관들이 자신의 무덤을 보며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기 위함이었다.(경기문화재단 인용)
고양 공릉천 변에 남아있는 덕명교비는 조선 효종 9년에 세운 비석이다. 공릉천은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기 일쑤여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곤 했다. 이에 고양군수를 비롯해 많은 고양 사람들이 힘을 합쳐 큰 돌다리를 세웠고, 그 이름을 ‘신원 덕명교’라 하였다.덕명교비에는 그대 힘을 보탰던 백성들과 관리의 이름이 빠짐없이 새겨져 있다.(경기문화재단 인용)

<사진 출처:진성규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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