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김덕령장군의 솥뚜껑 전투

윤의사 2020. 12. 29. 16:21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은 왜군과의 전투에서 가마솥을 이용하였다.

김덕령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소강상태일 때 병사와 백성들에게 줄 밥을 하던 중이었다.

이때 왜군이 쏜 조총이 쏱뚜껑을 맞히고 튀어 나갔다.

이를 본 병사가 김덕령에게 보고하였다.

"장군, 이를 보십시오."

"무슨 일이냐?"

"왜놈들이 쏜 총알이 솥뚜껑에서 튕겨져 나갔습니다."

김덕령은 무릎을 쳤다.

김덕령은 마을로 내려가 솥뚜껑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였다.

김덕령이 산 위에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솥뚜껑으로 방패를 삼은 병사들을 선봉에 세웠다.

왜군이 조총을 쏘자,

조선 병사들은 솥뚜껑으로 앞을 가린 채 멈추었다.

왜군의 조총 소리가 멎으면 조선 병사들은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조선 병사들의 접근에 왜군은 다시 조총을 쏘았다.

이번에도 솥뚜껑으로 가린 조선병사들은 전진을 잠시 멈추었다.

왜군은 자신들이 조총을 쏘면 멈추고,

조총 사격이 중지되면 자신들의 앞으로 오는 시커먼 물체가 괴물이 아닌가 생각하며 당황하였다.

이윽고 왜군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솥뚜껑과 함께 전진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조 28년(1595) 고성지방에 상륙하려던 왜군을 격퇴하였다.

장문포에서는 이순신장군과 수륙연합작전을 펴 진해와 고성을 지켜내기도 했지만,

선조29년(1596)에 일어난 이몽학 반란을 진압했으면서도,

충청도 순찰사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옥사하였다.

그후 현종 2년(1661)에 신원되었으며,

정조 13년(1789)에 충장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와 부인과 합장된 묘,

부인 흥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쫓기다

담양 추월산에서 절벽아래로 쓰스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사진출처:극락조블로거님

가마솥

 

가마솥의 나무뚜껑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계절밥상의 나무뚜껑으로 너무 세련되었다.

가마솥뚜껑이 전투에 사용되어 나무솥뚜껑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김덕령장군의 시호를 딴 광주 충장로

'우리역사문화사전 > 우리역사문화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금이 국력의 상징  (0) 2021.01.07
질지(作紙)  (0) 2021.01.06
인조의 원래 시호는 열조  (0) 2020.08.20
을씨년스럽다  (0) 2020.07.11
조선후기의 신종 직업 '매품팔이'  (0) 202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