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황의 제자가 되다 2

윤의사 2015. 1. 26. 10:35

스물한 살 되던 해에 성룡은 당시 가장 존경받는 학자였던 이황을 찾아갔습니다.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황은 성룡에게 차를 따라주며 살펴보았습니다.

얼굴에서 풍기는 빛이 예사롭지가 않구나. 게으름을 피지 않는다면 분명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에 잠기던 이황이 말했습니다.

자네의 꿈은 무엇인가?”

이황의 물음에 성룡은 당황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공부하는 것은 오직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꿈이라면 나는 자네에게 가르침을 줄 것이 없네. 그만 물러가게.”

이황은 실망하였습니다.

방에서 나온 성룡이 실망하면서 학당의 문을 나서려고 할 때 누군가 팔을 잡았습니다.

나는 김성일이라고 하오.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답을 찾아보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것까지 내가 말할 수 없지만 전에 권철대감께서 오셨을 때 일을 말해주지요.”

 

권철은 임진왜란 당시에 1등 공신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권율의 아버지이며, 어릴 적 이항복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손자 사위로 삼은 사람이었습니.

권철이 이황의 명성을 익히 들었기에 안동을 왔다가 한서암을 찾은 것입니다. 이황과 권철은 나랏일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 그러나 권철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 국, 반찬으로는 산나물과 콩자반, 귀한 손님이라고 하여 특별 메뉴로 준비한 것이 북어 한 토막이었습니. 이황이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는 동안에 권철은 몇 숟가락을 뜨다가 말았습니. 다음 날 아침에도 같은 식사가 나오니, 권철은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길을 나섰습니. 길을 나서면서 이황에게 말했습니.

이공이 나라와 저를 위해 좋은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시골에 사는 제가 감히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변변한 대접도 못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사는 일반 백성들의 그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입니다. 이것을 잡숫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라의 앞날이 은근히 걱정되는군요. 관리와 백성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이 진심으로 따르겠습니까?”

권철은 부끄러웠습니.

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

 

도산서원 전경

성룡에게 도움말을 준 김성일은 정구, 류성룡과 함께 이황의 3대 제자입니다. 김성일은 평소에 백성들의 생활이 편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움직임을 알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룡은 김성일의 말을 되씹어보았습니다.

꿈이라?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다음 날 성룡은 이황을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오?”

제 꿈을 찾았기에 배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말해보게.”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바르게 이끄는 것이옵니다.”

그제서야 이황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 꿈을 위해 절대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네.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자네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네.”

성룡은 이황의 격려를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 1년이 지나고 성룡은 진사생원(進仕生員) 동당초시(東堂初試)를 치러 서울로 떠났습니. 서울로 떠나던 아침, 부인 이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

이 엿을 가지고 가셔서 시험장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드시지요?”

성룡은 부인 이씨의 마음이 고마웠습니. 문경새재를 넘던 선비들에게 옷이 떨어져 누덕누덕 기워 지저분해 보이는 할머니가 엿을 팔자, 다른 선비들은 더럽다고 모두 피했으나, 오직 한 선비만 할머니의 엿을 사먹고 과거에 급제한 이후 생겨난 풍습이었습니.

성룡은 부인이 준 엿을 먹으며 시험장으로 들어섰습니. 시험장 안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 돈이 많거나 좋은 집안의 사람들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인 몇 명과 함께 시험장으로 들어섰습니. 긴장하고 있는 선비들과 달리 성룡은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습니.

드디어 시험관이 나타나 시험 제목을 주었습니. 시험장은 제목에 맞추어 글을 짓느라 조용해졌습니. 성룡은 평소에 쓰던 글솜씨대로 거침없이 써내려 갔습니. 그리고 맨 먼저 시험답안지를 냈습니. 성룡의 행동을 본 선비들은 수군거렸습니.

벌써 나가는 거야.”

촌스러운 모양새이더니만 벌써 포기한 모양이군.”

성룡은 선비들의 말을 들으면서 태연하게 시험장을 빠져 나왔습니.

해가 질 무렵 시험 결과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입학 시험의 장원(1등을 가르킴)은 류성룡 선비요. 어서 이 앞으로 나오십시오.”

성룡은 천천히 시험관 앞으로 가서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말했습니.

제가 류성룡이옵니다.”

성룡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놀랬습니.

뭐라고, 그대가 류성룡이라고?”

시험관은 허름하게 옷을 입은 성룡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

그렇습니다.”

축하하네. 앞으로 열심히 학업에 힘써주기 바라네.”

성룡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습니.

이어서 명종 19(1564) 7월 생원회시(生員會試)1, 진사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습니. 입학 수속을 마치고 성균관에 들어간 성룡은 분위기에 실망하였습니. 학생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술이나 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벼슬아치들과 어울려 벼슬을 얻을까 하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 꼭 스님이 염불에는 생각이 없고,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에 관심 있다는 염불보다는 젯밥의 속담과 어울리는 광경이었습니. 한편으로 그러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었습니. 자신과 같은 유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자들이 연산군때 무오사화갑자사화를 통해 죽음을 당하였습니. 이어서 중종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명종때는 을사사화로 또 한번 피해를 당하자 아예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된 것이었습니. 이러한 4대 사화로 선비들이 뜻을 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도 학문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 그러나 성룡은 결코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오직 학문에 힘썼습니. 다른 학생들은 학문에 열심인 성룡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 그들은 밤마다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성룡도 데리고 함께 가려고 하였습니.

이보게, 함께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세나.”

그들의 권유에 성룡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

아닐세. 자네들이나 즐기고 오게나.”

성룡의 거절에 그들은 그를 핀잔했습니.

아니, 그렇게 공부만 열심히 해서 무엇을 하겠나? 요즘 같은 세상에는 적당히 하면서 사람도 사겨야 출세길이 빠르다네.”

그러나 성룡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습니.

여보게,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학문에 힘써야 이 나라의 앞날이 밝은 것일세.”

성룡의 꾸짖음에 성균관 학생들은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

저 사람은 우리하고 다른 사람일세.”

그러세.”

 

성균관 명륜당 전경

 

그로부터 1년 뒤인 명종 21(1566) 10월에 별시 문과에 급제를 하였습니다. 성룡은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른 성룡은 성절사(중국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의 서장관(외국에 보내는 사신 중 기록을 맡아 보는 임시 벼슬)으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집을 떠나는 날, 류성룡은 부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까지 모시는 당신에게 많이 미안하오. 내가 없는 동안에 집안을 잘 이끌어주시오.”

나리께서는 아무 걱정을 하지 마시고 오직 나랏일에 집중하기 바랍니다.”

부모님에 대한 성룡의 효성심을 아는 만큼 이씨부인도 성룡이 부담없이 사신길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