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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성지 역사박물관

윤의사 2026. 5. 17. 15:09

서대문 성지 역사박물관에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하면서 한문과 한글로 번역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성리학과 척사의 입장에서 평가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부당성을 주장하는 책들도 있다.(사진, 글:서대문성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1. <주교요지>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저술한 최초의 한글 교리서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의 한글 번역 사업이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은 단편적으로 전하는 <주교요지> 같은 서적과 성경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 책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현실에 맞추어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으며, 서구의 종교 사상을 유교적 관점에서 받아들인 남인신서파 학자의 대표적 저술로 전한다.

 

2. <천주실의>

마테오 리치 신부가 1607년 북경에서 저술한 한문으로 번역한 교리서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을 유교의 상제(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초자연적인 절대자)와 결부하여 천주라는 개념으로 중국에 처음 소개했다. 육경 사서와 그 밖의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철학과 신학을 이해할 수 있게 작성했다. 이 책은 18세기 후반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천주실의>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이는 이수광(1563~1628)으로,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내용이 대략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3. <성경직해>

  예수회 디아즈 신부가 1636년 북경에서 쓴 복음 해설서다. 교회력에 따라 연중 주일과 축일을 소개하고, 각 주일과 축일에 해당하는 성경 말씀과 해설을 수록했다. 한글로 번역된 성서의 효시다. 2002년 당시 문화관광부가 ‘100대 한글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4. <상재상서>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이 체포되기 전에 기해박해(1839)를 주동한 우의정 이지연에게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려고 쓴 글이다. 천주교 박해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밝히고 있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호교서로 꼽힌다.

 

5. <칠극>

  판토하 신부가 1614년 북경에서 저술한 한역 교리서이자 천주교 수덕서이다. <천주실의>와 함께 일찍부터 조선에 전래되어 남인 학자들이 천주교에 입문하는 데 기여했으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이 읽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칠극은 곧 우리 유교의 극기설로,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예로 돌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전제한 뒤,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를 소개했다.

 

6.  <징의>

  신유박해 때 문초와 형벌을 받은 천주교 신자들의 진술 내용과 판결문 등을 수록한 책이다. ‘징의’는 ‘천주교를 징벌하고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편다’는 뜻으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척사(斥邪)의 입장에서 편찬된 책이다. 1권에서는 정순왕후의 천주교 금지령으로부터 신유박해 사건을, 2권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벌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7. <벽위신편>

  윤종의가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한 서양 세력의 조선 침투를 우려하여 그에 대비하는 벽사위정(闢邪衛正)의 방편을 제시하고자 펴낸 책이다. 7권 5책으로 되어 있다. 당시는 헌종 12년(1846) 이래 잇따른 프랑스 함대의 내항으로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당시 사회를 지배해 오던 유교 지식인층은 그에 대비하려는 벽사위정적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윤종의는 이 책에서 천주교를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시했다.

 

8. < 성호선생전집_천주실의발>

  18세기 조선에서 진취적으로 한역 서학서를 읽고 서학을 연구한 성호 이익의 문집이다.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 서학서에 관한 발문이 담겨 있다. <천주실의발>은 <천주실의>를 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한 논평이다. 이익은 유학을 기반으로 서양 학문과 문화는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였으나, 종교적 측면의 천주교에는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