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싶은 곳/우리나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윤의사 2026. 5. 16. 11:08

서울역에서 서대문 쪽으로 500m를 가다보면 약현성당이 있다.

약현성당 건너편에 서소문성지박물관이 있다.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西小門)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다.

이곳은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들어내는 문으로 시구문(屍軀門)이기도 하였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물류가 오가는 통로이자 의주로와 가까이 있어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이었다.

하지만 서소문 밖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까워 부대시참<不待時斬:법으로 정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斬刑)을 집행하는 일>의 집행이 용이하였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도 인접하여 죄를 지으면 어떤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광고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나아가 조선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여러 조건이 합당하기에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국가 공식 참형지(斬刑地)가 되었다. 이는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즉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1416) 7월 17일

 

사람을 사형하는 장소를 정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사람을 동대문(東大門)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사(社)에서 죽인다.’ 하였는데,

‘사(社)는 우편에 있으니, 빌건대, 예전 제도에 의하여 서소문(西小門) 밖 성 밑 10리 양천(陽川)지방, 예전 공암(孔巖)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800년 천주교에 대한 온건한 정책과 탕평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노론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천주교 탄압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18세기 이래 천주교 사상을 포함한 서학(西學)이 ‘그릇된 학문’으로 판단하면서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를 거치는 동안 순교자들은 이곳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성리학체제에 항거해 인간평등을 주장한 순교자의 터가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주자학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유교의 경전을 해석하여 새로운 학설을 추구했던 학파)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등이 순교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는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등이 순교하였다.

이곳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자치구인 중구에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제안했고, 8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상은 역사공원으로 지하는 성 정하상 기념경당을 비롯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2019년 6월 1일 개관하였다.(리플렛 참고)

지상의 서소문역사공원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입구
103위의 성인(왼쪽, 김기회 작/2011)과 순교자의 무덤(오른쪽,최지만 작/2017)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남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정순왕후와 조카 김노서가 천주교인들의 행실을 논한 편지이다.
1839년 기해년에 헌종이 천주교의 폐해를 막고자 내린 교서, 기해사옥 때 300여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병인척사윤음,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라고 생각해 탄압하였다. 1866년부터 1873년까지 8천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순교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