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7일 오늘의 역사, 청백리 유관이 죽다

윤의사 2026. 5. 7. 10:51

<세종실록>60, 세종 15(1433) ()57일의 기사가 있다.

 

우의정으로 사임한 유관이 졸()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곧 죽음을 애도하고자 하니,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정조장(停朝狀)을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흰 옷과 흰 산선(繖扇)으로 홍례문 밖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과 같이 거행하였다. 관의 처음 이름은 관()이고, 자는 몽사인데, 뒤에 이름은 관(), 자를 경부로 고쳤다. 황해도 문화현 사람으로 고려 정당 문학 공권의 7대손이다. 신해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서 전리 정랑, 전교 부령이 되고, 봉산 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성균 사예가 되고, 내사 사인과 사헌 중승을 거쳤다. 태조가 원종 공신권을 하사하고, 대사성·좌산기와 이조·형조의 전서를 거쳐, 강원·전라 두 도의 관찰사와 계림 부윤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예문관 대제학, 형조 판서를 지나, 두 번 대사헌이 되고, 의정부 참찬과 찬성으로 옮겨 갑진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관은 공순 검소하고 정직하며,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며, 무경(武經): 군사나 병법에 관한 책에 이르러서도 모두 섭렵하였다. 집에 있을 때 살림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기고, 비록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이단을 배척하여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불공을 하지 말고 일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르되, 포해(脯醢)만은 없애라. 시속에서 놀라고 해괴히 여길까 두렵다. 비록 기일(忌日)을 당할지라도 불공을 드리고 중을 먹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88세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치조(致弔 : 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조문하는 일)하며, 관에서 장사를 다스렸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덕을 한결같이 닦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간()이다. 아들 셋이 있으니, 유맹문(柳孟聞유중문(柳仲聞유계문(柳季聞)이었다.

 

청백리인 유관에게는 일화(逸話)가 전해진다.

 

장맛비가 오래 계속되어 방안까지 빗물이 들어올 정도였다. 나중에는 지붕에서도 비가 세자 유관은 우산을 쓰고는 비를 피했다.

그리곤 걱정하는 부인에게 말했다.

"우산(雨傘)도 없는 집은 이런 날 어떻게 견디겠소

이후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다고 한다.

 

유관은 고려의 공민왕부터 조선의 세종까지 8대 왕을 모시며 태종 때 대제학을 거쳐 세종 땐 우의정을 역임했다. 고령이 돼 임금에게 사의를 표명했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유관은 변치 않고 늘 청렴하면서 검소한 모습에 임금은 물론 백성들까지 오랫동안 존경하는 존경하는 정승이었다고 한다.

정승까지 지낸 유관이었지만, 울타리 없는 오두막에 살았으며 수레나 말()을 타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녔다.

권력을 지녔음에도 겨울이나 여름에나 짚신을 신었으며,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농사를 하기도 했다.

얼마나 평범하게 살았으면 동네() 사람들이 정승인 줄을 몰랐을까? 정직하며 늘 청렴결백한 태도가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사진:국가유산청)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에 있는 유관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