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명릉(明陵)에 장사지내었다. 묘시(卯時)에 현궁(玄宮)에 내리니, 임금이 승지(承旨)·사관(史官)을 거느리고 소복(素服) 차림으로 숭문당(崇文堂)에서 망곡(望哭)하고, 세자(世子)는 궁관(宮官)을 거느리고 시민당(時敏堂) 남쪽 뜰에서 망곡하였다.
의 기사가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현왕후가 영면에 든 것이다.
"장다리는 한 철이나 미나리는 사철이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메꽃같은 우리 딸이 시집 삼년 살더니
미나리 꽃이 다 피었네"
이 노래에서 "미나리"라 함은 인현왕후 민비를 뜻하고,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한다.
이렇게 볼 때 이 노래는 첩에 빠져있는 남편에게 첩은 한철에, 본처는 사철에 비유해서, 남편에게 그 잘못을 말하고 본처에게 돌아오기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을 둘러싼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는 늘 암투와 시기 질투가 있었으니 그 최고봉이 조선조 최고의 악녀로 알려진 장희빈과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존경심을 받던 인현왕후에 얽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숙종을 사이에 둔 이 두 여인은 사실 서인과 남인의 붕당 정치로 희생된 것이었다.
인현왕후는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다. 인현왕후는 덕이 높고 인자하며 아량이 넓어 모든 일을 넓은 마음으로 처리해 나가는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 15세인 숙종 7년(1681년)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인경왕후 김씨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되었다. 숙종의 후비로 궁궐에 들어간 지 6년이 지나도록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니 나라의 큰 걱정이 되었고 왕비 자신에게도 큰 걱정이었다. 그리하여 늘 생각하기를, 기왕 나 자신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임금께서 늘 마음에 두시는 궁녀 장희빈을 다시 데려다가 인연을 맺게 하는 것이 왕비로서 현명한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희빈 장씨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궁녀로 입궁하였다. 원래 장옥정은 야망이 컸던 소녀였다. 숙부 장현(張炫)은 비록 중인이었지만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로 기록될 정도로 부자였다. 그런데 서인들에 의해 일어난 ‘복창군 복위 사건’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복창군 복위 사건’은 ‘홍수(紅袖)의 변’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중 복창군이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명성왕후가 복창군이 후궁들과 불륜을 맺었다며 처벌한 사건이다. 그러나 무고로 드러나 남인들의 반발이 거세자 명성왕후는 남인과 복창군을 함께 처벌을 주장하면서 남인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희빈 장씨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신분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오직 궁궐에 들어가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어머니의 애인인 조사석의 소개로 동평군을 만나 궁인이 되었다. 이렇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전의 궁녀가 된 옥정은 짦은 시간에 숙종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숙종은 스무 살의 한창 나이에 열 한 살 때 얻은 동갑 부인 인경왕후 김씨를 잃어 외로움에 젖어 있었던 터라, 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미녀 옥정에게 쉽게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용납할 수 없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숙종의 어머니이자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 김씨였다. 그녀는 머리가 아주 뛰어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거느리지 못한 조선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고 전할 정도이다. 그런 그녀가 중인 출신인 희빈 장씨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녀는 희빈 장씨를 천하고 무식하며 성품이 극악하다는 이유로 장령왕후의 궁궐에서 내좇았던 것이다.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일 때는 명성왕후가 이미 죽고 난 뒤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에 아들 숙종이 어의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질병에 걸려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다. 어의가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치료에 효과가 없자 명성왕후는 무속신앙에 의지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무속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던 명성왕후에게는 모성으로서 마지막 치료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외아들인 숙종이 아무 일없이 병이 치유되기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다. 무당은 '현왕(現王, 숙종)에게 삼재(三災)가 있어 기질을 앓고 있는 것이니 현왕의 쾌유를 위해서는 왕의 어머니(명성왕후)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고 계시를 내렸다. 이에 명성왕후는 무당의 헛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겨울의 살을 에는듯한 추위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에 걸렸고 그해 1월 21일(음력 12월 5일)에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시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없기에 인현왕후는 대왕대비인 장렬왕후를 만나 여러 번 간청하였고, 장렬왕후는 자신이 아끼던 희빈 장씨의 재입궐을 처음에는 만류하는 척하다가, 마침내 숙종12년(1686) 4월에 장희빈의 재입궐을 허락하였다. 숙종의 전교로 장희빈을 불러들인 것은 그해 5월 16일이었다.
하지만 인현왕후의 뜻에 의해 다시 궁궐에 들어온 장희빈은 궁궐에 들어오자 남인들과 결탁하고 숙종의 국정을 어지럽히면서 단번에 큰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1688년 후궁 장희빈이 아들 균(경종)을 낳은 지 두 달만에 숙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균을 원자로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숙종 15년(1689) 4월에 숙종은 ‘투기’와 ‘무자(無子)'라는 죄명을 둘러씌워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계속해서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을 축출하고 남인을 대거 등용하였으니,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궁녀 최씨는 궁녀들 중 가장 낮은 지위인 무수리로 효자동에 살다가 숙종 때 궁궐로 들어갔다. 최씨는 어느 날 장희빈의 모략으로 쫓겨난 왕비 민씨를 그리면서 방안에서 민중전의 생일 음식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다가 암행하던 숙종께 발견된다. 임금이 그 사유를 다 듣고는 최씨의 지성과 인정에 감동하여 그녀를 가까이 하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 또한 깨닫게 되었다. 궁녀 최씨는 얼마 후 옥동자를 낳았으니, 그가 곧 영조(英祖)이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명릉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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