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21일 오늘의 역사, 소현세자가 죽다

윤의사 2026. 5. 21. 10:48

<인조실록> 46, 인조 23(1645) (음)4 26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사람의 도량과 재능을 아울러 이르는 말)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일찍이 정묘호란 때 호남에서 군사를 무군(撫軍)할 적에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썼다. 또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도적 청인(淸人)들이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차마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君父)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서쪽으로 갈 적에는 몹시 황급한 때였지만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 없었고, 모시고 따르던 신하들을 대우하는데 있어서도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으며, 무릇 질병이 있거나 곤액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무인)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재화의 이자)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인데, 3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 이왕(李汪)은 광해군 4(1612)에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조 3(1625)에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 5(1627)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호남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같은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의 딸 민회빈과 혼인하였다. 이원익 · 장유 등을 스승으로 공부를 하였다. 인조 14(1636), 병자호란 때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청의 요구에 스스로 봉림대군과 김상헌 등 관리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에 갔다. 심양에서는 인질이라기 보다 조선의 외교관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이를 저지하려 노력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세자가 처리하도록 하니 심양관이 조선과 청나라 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청나라를 인정하면서 청나라 왕족, 관리들과 교류하며 양국관계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644 9월에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무는데,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 일명 湯若望)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 · 수학 ·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 · 천주상(天主像)을 가져오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 세력은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해 소현세자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특히 세자빈인 민회빈이 사무역(私貿易)을 통해 현지에서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을 싫어했다. 민회빈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인조의 총애를 받는 조소용은 세자가 심양에서 장사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잠도역위(潛圖易位 : 세자가 물밑에서 왕위를 바꿔 오르려 한다)이며, 세자를 대신해 인조를 청에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이에 인조는 심양관에 간자를 보내 세자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1645 2 18일에 귀국하였다. 하지만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인사도 받지 못하게 했으며, 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문물로 인해 인조를 화나게 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와의 갈등으로 인질 생활로 인한 허약함에 스트레스까지 겹쳐 1645 4 23일 자리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양력 5월 21일)에 급서하였다. 세자를 치료한 의관은 조소용과 관련된 사람으로 3개월 전에 특채되었기에 의심을 샀다. 신하들의 처벌 요구도 인조는 그럴 수 있다라면서 개의치 않았다. 또한 세자의 사인도 규명하지 않고 의관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은 채 입회인을 제한하여 장례를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피가 나왔으며 피부가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독살되었음을 추측하게 하고 있다. 역사에 만일이란 없지만, 만일 소현세자가 임금으로 즉위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소현세자가 죽은 뒤 민회빈과 반목하던 조소용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 고 무고하여 민회빈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이어 인조의 수랏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아 후원 별당에 유폐되었다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4월 30일(음력 3 15일)에 사사(賜死)되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사이의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중 이석철·이석린 형제는 죽음을 당했다. 셋째 아들 이석견은 효종대에 경안군이 되었다.

강빈은 숙종 44(1718)에 복위되어 민회빈(愍懷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소현세자가 묻혀있는 소경원(서삼릉, 궁능유적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