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3일 오늘의 역사, 임꺽정을 체포하다

윤의사 2026. 1. 3. 18:50

<명종실록>28권 명종 17년(1562) (음)1월 3일

정원이 황해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 의 서장(書狀)【큰 도적 임꺽정(林巨叱正) 등이 서흥(瑞興) 땅에 머물러 있었는데, 군관(軍官) 곽순수(郭舜壽)·홍언성(洪彦誠) 등이 사로잡았다.】 을 입계하니, 전교하였다.

"선전관(宣傳官)과 금부 낭청(禁府郞廳)과 포도 군관(捕盜軍官) 등을 속히 보내어 잡아오도록 하라."

 

라는 내용으로 1562년 (음력)  1월 3일에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 시절 활동했던 도적떼 두목으로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도적이다.
다른 도적들이 관군과 맞서 싸운 적도 없지만, 임꺽정은 관군과 맞서 이기면서 조선을 뒤흔든 도적이었다.

혹자는 임꺽정을 의적(義賊)이라고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임꺽정은 농지가 없는 농민인 ‘백정’이다. 백정이 농사지을 땅이 없다보니 먹고살기위해 버드나무 등으로 생활도구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는 고리백정으로 흔히 말하는 짐승을 도축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현재 남양주시) 출신이다.  
백정으로 정착하지 못해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세종대왕이 불쌍하게 생각해 농지를 주면서 정착민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세종 이후 백정에 대해 농사지을 땅도 주지 않고 강제로 정착시키려 하니 불만이 쌓여갔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부정부패와 학정에 반발해 자신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을 모아 도적이 되었다. 특히 황해도에 많던 갈대밭을 토대로 삿갓 등을 만들며 생활하던 임꺽정 등의 터전을 권세가들이 강탈하거나 세를 받아가며 불만이 폭발해 도적화되었다.

도적을 선발하며 20말이 든 팥자루(약 30kg)를 어깨에 들러메고 산꼭대기까지 올라야 임꺽정의 도적이 될 수 있었다. 힘과 기동성을 활보하려는 임꺽정의 생각이었다.

그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부패한 관리를 처단했기 때문이며, 이야기 속의 의적처럼 관청이나 부자들의 곡식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임꺽정은 주로 황해도 및 함경도를 중심으로 관청과 부자들의 재물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을 해치지는 않았으며, 단지 자신의 위치를 관청에 알려준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한양의 장통방까지 진출해 관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자신들이 도둑질한 물건을 내다팔려는 대담성까지 보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임꺽정을  ‘국적(國賊)’이라 부르며 토벌을 명령하였다. 명종 14년(1559) 음력 3월 27일 개경부 도사를 무신으로 뽑아 토포사를 보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명종 15년(1560) 11월 24일 임꺽정의 모사인 서림을 남대문 밖에서 체포하면서 임꺽정을 압박하였다. 서림은 "임꺽정이 어디에 있는 지 말하면 죄도 없애고 상도 주겠다"는 관군의 회유책으로 관군의 길 안내자가 되어 임꺽정을 쫓다가, 명종 17년(1562) 음력 1월 3일 황해도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에게 사로잡혔다.

이때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실록에 보이는 것처럼 서울로 압송하도록 한 것을 보면 후에 사형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임꺽정은 의적이 아닌 단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도적에 불과할 뿐이다.

철원에 있는 임꺽정 동상
임꺽정이 활동했다는 철원 고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