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5일 오늘의 역사,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승리

윤의사 2025. 12. 5. 18:46
<선조실록>33권, 선조 25년(1592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치계(馳啓:보고서를 올리는 일)하였다.

"지난 10월 5일에 적이 1만 명을 셋으로 나누어 곧바로 진주를 침범하여 경상 우병사 유숭인, 사천 현감 정득열, 배량 권관 주대청이 출전하여 전사하고, 진주 목사 김시민, 판관 성수경, 곤양 군수 이광악은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고 제장과 함께 각 문을 나누어 지켰습니다. 7일에 왜적은 대나무를 베어 방패로 삼아 줄지어 진을 만들고 사이사이에 목판을 끼워 점차로 진격해 와 크게 소리치며 포를 쏘았습니다. 신시에 잠깐 물러갔다가 초경에 또 진격해 왔으며, 삼경에 다시 물러갔습니다.

이보다 앞서 신은 진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삼가의병장 윤탁, 의령 가장 곽재우, 초계 가장 정언충 등으로 하여금 동쪽으로부터 들어가고, 합천 가장 김준민은 북으로부터 들어가고, 전라 의병 최경회는 서쪽으로부터 들어가고, 고성 가장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은 남쪽으로부터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윤탁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정언충은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변에서 모였는데, 마현에서 적과 부딪쳐 오랫동안 크게 싸우다 군사가 궤멸되어 돌아왔습니다. 곽재우는 선봉장 심대승으로 하여금 북산에 올라가 햇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방포하면서 성중에다 대고 크게 외치게 하기를 ‘전라도의 원병 1만여 명과 의령의 홍의 장군이 합세하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하였다.’ 하니, 성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크게 외치면서 서로 호응하였습니다. 김준민은 결사대 80여 명을 거느리고 단계현에 이르니 적들이 바야흐로 관사를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김준민이 곧바로 돌격하여 20여 리를 뒤쫓으니 적은 흩어져 퇴각했습니다. 조응도는 남강 10리 밖에 이르러 멀리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서 영적을 나누어 소탕하였습니다.

10일 밤중에 적은 동·북·서 세 문으로 나누어 침범해 왔는데 혹은 긴 사다리를 세우기도 하였고, 혹은 성밑을 파기도 하고, 혹은 장작을 쌓아 불을 놓기도 하여 연기가 하늘을 가렸습니다. 김시민은 자신이 직접 독전하였는데 철환이 김시민의 이마를 맞추니 성안이 소란해졌습니다. 적이 북문을 5∼6척이나 뚫고 그곳으로부터 들어오려고 할 때 이광악이 다시 제장을 독려하여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는데 적은 개미처럼 붙어 올라오므로 불을 밝혀 끓는 물을 쏟고 혹은 진천뢰를 던지기도 하여 죽은 자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옷을 입은 한 왜적이 양견마(兩牽馬)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여 돌진해 오자 이광악이 화살로 쏘아 죽였습니다. 적들이 모두 통곡하며 시체를 메고 돌아가니 성안은 이로 인해 사기가 충천하였습니다. 최덕량은 서문을 방수하고 있었는데 적 수천 명이 뜻밖에 충돌해 오는 바람에 성가퀴를 지키던 수천 명이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최덕량이 그의 관하를 거느리고 죽기를 한정하고 힘껏 싸워 물리치니 적들은 성밖에 있는 1천여 채의 집을 불사르고 신시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 함양 등의 길로 향하여 갔습니다."

 

의 기사이다. 격렬했던 1차 진주성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은 명종 9(1554) 음력 8월 27(양력 9월 23)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김충갑의 3남으로 태어났다. 몽골침입 때 활약했던 김방경장군의 12대 손이다.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전쟁 놀이를 즐겨 우두머리로 친구들을 이끌었다.

8세 때 동네에서 전쟁 놀이를 하는데. 마침 천안군수 가 길을 나서면서 이방이 길을 비키라고 하자,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 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천안군수가 말에서 내려 장군에게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김시민은 선조 11(1578) 25세의 나이로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1591년에 진주판관이 된 그는 공명정대하게 다스리고 덕을 베풀어 백성들과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김시민은 진주목사 대행을 맡아 무기를 수리하고 성을 보수하는 한편, 군사를 늘려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3만여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쳐들어오자,

곽재우, 최강 같은 의병들의 도움을 받아 음력 12월 5일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진주대첩이며, 이때 2만여 명에 가까운 일본군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진주대첩의 승리로 호남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을 막아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 지대를 지킬 수 있었고, 관군도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진주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거둔 3대 승리의 하나가 되었다.

 

김시민장군(출처:김시민장군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