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1646) (음)6월 17일의 기사를 보면
(전략)
기원의 모역에 참여했다는 일은 정말 얼토당토하지도 않습니다. 신이 일찍이 낙안의 수령이 되었을 때 기원의 뜻에 거슬려 이미 틈이 벌어졌는데, 어찌 그가 기꺼이 역모를 알려주겠으며, 만일 신이 과연 역모에 참여하였다면 하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타국으로 도망쳤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여러 신료에게 하문하기를,
"경업이 역모에 참여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미 백금(白金)을 주고 승려 복장까지 보내주어 망명토록 하였습니다. 그가 공초한 말을 가지고 보더라도 의심할 점이 많습니다."
하고, 남이웅이 아뢰기를,
"승려 복장을 보내주고 망명토록 유도했다면 그들이 얼마나 친했는지를 알 만합니다."
하고, 추관(推官) 모두가 경업의 형적이 의심스러우니 반드시 숨기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형신하기를 똑같이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다면 형추(刑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두 차례 형신하였다.
(중략)
자점이 아뢰기를,
"율문(律文)에 본국을 등지고 몰래 타국에 들어간 것은 반역과 같다 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개진한 바도 대체로 형에 처하기를 청하는 뜻인 듯합니다."
(중략)
"경업이 이미 죽었습니다."
하니, 상이 측은해 하며 이르기를,
"경업이 죽었단 말인가.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중략)
경업은 충원 사람이다. 본시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무과에 급제한 후, 상신 김류가 재주가 뛰어난 그를 사랑하여 청북 방어사를 제수하였다. 그 지역은 가도와 심양 사이에 끼여 있었는데 제법 일을 잘 무마하였으며, 오랫동안 서쪽 국경에 있으면서 인심을 많이 얻었다. 형신을 받게 되자 그가 크게 부르짖기를,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불쌍해 하지 않음이 없었다.
결국 임경업 장군은 김자점의 모함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치면서도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한 비운의 장수이다. 그러나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불굴의 용기는 민중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고대 소설 <임경업전>을 탄생시키기도 했으며, 최영 장군과 함께 무격신앙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임경업은 어린 시절에 전쟁 놀이를 자주 했는데, 똑똑하고 힘이 세서 꼬마 장군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항우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산속에서 5년 가까이 무예를 닦고 병서를 익히는데 힘썼다.
중국에까지 이름을 드날리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하고 인조를 공주로 피난가게 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이때 임경업이 길마재에서 반란군을 크게 무찔러 진압하여 이름을 떨쳤다.
정묘호란이 일어나 조선은 당시 후금이었던 청나라와 강제로 형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633년에 그는 영변부사가 되어 백마산성을 다시 쌓고, 의주의 성곽을 보수하여 국경 지방인 서북 지방을 굳건히 지켰다. 이대 명나라 장군 공유덕 등이 우가장으로 도망와서 후금의 힘을 빌려 명나라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임경업은 명나라 군사를 도와 반란군을 몰아내어 명나라 황제에게 벼슬을 받고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뛰어난 용맹으로 청나라에 싸움을 걸다
후금이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청나라 태종은 임경업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의주를 피해서 서울로 내려갔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결국 40여 일 만에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으며 항복하고 말았다.
이대 임경업이 청나라의 서울인 심양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김자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청나라 태종의 조카인 요퇴를 압록강 부근에서 무찔러, 잡혀가던 백성 100여 명을 구하고, 말 60여 필을 빼앗아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씻을 수가 있었다.
간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치겠다며 조선에 여러 번 원병을 요청하였고, 주로 임경업이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명나라와 비밀스럽게 연락해 함께 청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청나라로 잡혀가던 길에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명나라의 장군이 된 그는 다시 청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붙잡혔다가 조선에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고국에서 임경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나라를 배반하고 죄를 저질렀다는 김자점의 모함뿐이었다. 임경업은 모진 매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사진:충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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