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4월 28일 오늘의 역사, 이순신 장군 탄신일

윤의사 2026. 4. 28. 15:24

오늘은 임진왜란에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날이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본인의 노력과 작전도 있었지만,

장군을 보좌하는 참모들도 우수했다.

이순신 장군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도와준 참모들이 있기에 전승이 가능했던 것이다.

먼저 녹도 만호 정운이다.

이순신 장군보다 2살 연상으로 어영담과 함께 장군이 가장 믿는 참모였다.

그는 장군이 좌수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미 왜선 20척이 출몰했던 정해왜변을 겪은 후이기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는 왜군과의 전쟁에서 언제나 앞장서 싸웠으며, 한산도 대첩에서 큰 전공을 세우는데 적선 대선 2척 격침 및 3명의

목을 베고 2명의 포로까지 구출했다. 하지만 부산해전에서 왜군의 조총을 맞고 49세로 전사했다.

좌 정운이면 우 희립이다.

송희립으로 1591년 장군의 직속 군관이 되어 거북선을 만드는 과정을 총감독했다.

장군이 원균의 모함을 받고 추국을 당할 때 대궐 문앞에서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장군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후 장군이 복귀해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일조했으며, 왜군이 명의 장수 진린에게 화친을 청했을 때 왜군을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군도 동의하며 노량에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송희립은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1623년 12월에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어영담이다.

그는 장군이 장계에 올린 "경상, 전라 두 지역의 변장으로 임명되어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할 정도로 남해의 물길을 잘알기에 항상 장군의 선단을 이끄는 향도 역할을 하였다. 장군은 이어서 "호남의 한 고을이

이제까지 보전된 데는 이 사람이 한몫하였습니다"라고 그의 능력과 공적을 높이 샀으며, 어영담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날인

1594년 4월 초9일 일기에는 "이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라고 쓸 정도였다.

이어서 나대용이다.

1591년에 장군의 휘하에 군관으로 들어가 거북선을 개발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운 옥포, 사천, 한산도, 명량, 노량 등 주요 싸움에 참여했다. 
전란이 끝난 1606년 판옥선과 거북선의 성능을 높인 창선을 만들어 적은 수군으로 전선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1611년에 경기도 수군을 관장하는 정3품 교동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천해전에서 입은 부상이 재발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군과 이름이 같은 이순신도 있다.

덕수 이씨인 장군과 달리 전주 이씨였지만 절친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동안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 등에서 9번을 선봉으로, 1번을 중군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웠다. 장군은 특별히 그의 군공을 적어 포상을 주라고 조정에 올렸을 정도였다.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전사하자 본인이 바로 그 자리에서 사령관이 되어 부대를 이끌고 개선하여 전투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었으며, 그 공으로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천거받았다.

하지만 뇌물수수 및 부정을 저질러 여러 번 탄핵받은 기록이 있어 흠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빡에 많은 참모들이 활약해 장군이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위 왼쪽부터 정운장군 충신각(해남군), 송희립 장군의 서동사(고흥군), 광양현감 어영담의 수군이 주둔하던 (구)진월면사무소 선소기념관(광양시),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광명시)
나주시에 있는 나대용 장군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