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군사작전분계선을 통해 분할점령은 했으나,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분할점령이 분단으로 전환되려면 주민들의 생활분단선 및 통치분단선으로 변질되어야 했다.
즉, 민간인의 통제를 규제하면서 정치적 분단이 이뤄져야만 했다.
그래서 미국의 군사분계작전이 분단의 원인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소련군이 1945년 8월 9일부터 남하하여, 15일 청진, 23일 개성까지 진입했고, 28일까지 38선 부근의 교통요지를 점령했다. 이어서 8월 24-25일에는 38도선 이남과 이북을 연결하는 철도인 경원선과 경의선을 차단했으며, 9월 6일 38선 이남 지역과의 통신 및 우편물 교환을 금지하였다.
당시 소련과 미국이 같이 점령한(미소 분할점령) 구역은 한국, 독일, 오스트리아 3개국이 있었는데, 이러한 국가 중 소련은 특히 한국에서 특별히 강하게 군사작전 분계선 붕괴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독일은 분할 점령이 지난 후 봉쇄를 했으며, 오스트리아는 1955년 철수할 때까지 봉쇄를 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조치에 계속적으로 협상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8일 미국은 남한에 도착해, 1946년 5월까지 4차례 38선 봉쇄해제를 위한 협상 개최를 제의했다.
38도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어(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김두봉, 서기장 강양욱, 위원 23명으로 구성) 실제적인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 산업국유화와 일제 잔재 숙청, 반민주주의 세력 처벌, 인민교육체계 수립 등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38도선 이남 지역은 어떤 정치체제도 세워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38도선 중심의 남과 북은 점차 이질적인 사회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계속해서 1946년 11월에 시,도 인민위원회를 구성했으며 1947년 2월에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와 행정부를 구성해 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곳에서는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등의 국가정책을 실시하는 실질적인 국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련군에 의한 38선 봉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등이야 말로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는 첫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소련과 김일성에 의한 남북 분단의 피동적 결과물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남북분단은 소련과 북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것이지, 미국의 38선 제안으로 분단이 초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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