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3일 오늘의 역사, 강원, 영남에 홍수가 나다.
지난 주에 한반도는 물에 뒤덮였다.
극한호우라는 어려운 한자어까지 등장했다.
'아주 많은 비가 한 곳에 집중적으로 내렸다'라고 하면 안될까?
이번 물폭탄으로 온 나라엔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가히 물폭탄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어서 빨리 피해 주민들이 안정을 찾길 바랄 뿐이다.
조선 선조 38년(1605) (음)7월23일에 강원도와 영남지방에 홍수가 났다.
당시 실록을 보면 지난 주에 내린 강우량 이상인 것으로 생각된다.
강원도 영서(嶺西)의 영월(寧越)·정선(旌善)·춘천(春川)·평창(平昌)·인제(麟蹄)·원주(原州)·횡성(橫城) 등 고을에 이번 7월 17일부터 동풍(東風)이 매일같이 크게 불더니, 바다의 갈매기떼가 까맣게 날아왔는데, 보기에 매우 놀랍고 괴이하였다. 20일 밤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갑자기 큰 홍수가 져 객사와 관청, 군기(軍器)·창곡(倉穀)을 휩쓸어 버렸고, 크게는 사찰과 작게는 촌락이 물이 지나친 곳은 모조리 쓸려나갔으며 우마(牛馬)와 가재 도구도 남김없이 모두 익사하거나 떠내려 갔다. 춘천은 소양정(昭陽亭) 누각이 부서지고 인물(人物)과 여사(廬舍)가 모두 매몰되었으며, 백곡이 손상되고 사석(沙石)이 뒤덮였다.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통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떠내려 가는 지붕 위에서는 닭이 울고 개가 짖어대며, 칼을 쓴 죄인이 물에 떠내려 오기도 하였다. 영월은 인가가 3백 39채나 떠내려 갔다.
영동(嶺東)은 강릉부(江陵府) 5리 밖에 남대천(南大川)이라는 내가 있어, 전에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냇가에 나무를 심고 제방을 튼튼히 쌓았는데, 본부(本府)가 설립된 이후 남문(南門) 밖에서 관노비(官奴婢) 1백여 호와 기타 백성들의 사노비(私奴婢)가 많이 살고 있었다. 갑자기 큰물이 덮쳐 내를 막은 수구(水口)를 파괴하고 굉음을 내며 천지를 삼킬 듯이 밀어 닥치니 1백여 호의 관노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붕이나 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나무가 뽑히고 집이 부서지니 일시에 떠내려가 처자와 형제 등 일가족이 줄줄이 비끄러맨 채 죽기도 하였다.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여 차마 듣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부사(府使) 김홍미(金弘微)는 직접 남성(南城)에 가서 크게 통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답은 천여 석 지기가 모래에 뒤덮였고, 가옥은 크고 작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침수되어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대관령(大關嶺)에서 해변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넓은 벌판에는 까마득히 백사(白沙)만 보일 뿐이고 익사한 우마가 부지기수였다.
인제는 1백 2채가 떠내려 갔으니 수재가 영서 지방에서 더욱 참혹했다. 관사·공해·향교·창고가 모두 떠내려 갔고, 관아에서 5리 거리에 있는 수백 년 된 소나무가 부러지고 뿌리채 뽑혀 모두 떠내려 갔고, 허다한 전답은 백사장과 연못이 되었다. 양양(襄陽)은 부내(府內)의 백여호의 대소 인가가 재산과 가축이 일시에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 형제 온 가족이 물에 빠지거나 산 사태에 압사하여 여염 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해변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고원(高原)은 표몰된 인가가 1백 7채이고, 우마(牛馬)와 여러 가축들이 대부분 익사했다. 금성(金城)·간성(杆城)·평강(平康)·홍천(洪川)·양구(楊口)·철원(鐵原)도 수재가 참혹했다.
경상도 안동부(安東府)는 이달 20일 강물이 크게 범람해서 끝없이 아득한 물바다를 이루더니 부성(府城)에 밀려 들어와 남문의 객사와 대청·관사가 모두 침몰되었다. 동남쪽 근교에 거주하는 관인(官人)과 백성들의 가옥이 모두 산산이 부서져 떠내려 갔는데, 가재 도구를 전혀 건져내지 못하여 비로 쓴 듯이 되었고 삼면의 자성(子城)도 붕괴되었다. 영호루(映湖樓)는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고, 여강 서원(廬江書院)도 완전히 떠내려 갔으며, 대가 세족(大家世族)의 백 년된 가옥들이 남김없이 떠내려 갔으니, 이번 수재는 개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경주는 부내가 큰 바다로 변하여 민가가 완전히 침수되었고, 선산(善山)은 들이 온통 물바다로 변했으며 인동(仁同)·영산(靈山)·군위(軍威)·창원(昌原)·예천(醴泉)·영일(迎日)·의흥(義興)·용궁(龍宮)·고령(高靈)·상주(尙州) 등도 첩보한 내용이 한결같았다. 예안(禮安)·안동(安東)·영산·초계(草溪)·의령(宜寧)·김해(金海)·창원(昌原)·함안(咸安) 등은 피해가 더욱 참혹하였다. 강변의 공해(公廨)와 민가는 부서져서 강을 뒤덮고 떠내려가고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부지기수였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
옛날 홍수가 난 상황을 표현할 때 산을 덮고 언덕을 넘쳤다고 하거나, 육지가 잠기고 산이 파묻혔다고 하였으나, 이처럼 형언할 수 없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니, 잔파된 상황이 임진년 적화(賊火)에 분탕질당했을 때보다도 더 심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정기적으로 청계천을 준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준설과 관련된 기록이 37건이나 나올 정도이다.
이번 호우에도 하천을 준설한 대전의 피해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반면, 준설을 하지않은 삽교천 주변의 피해는 크다.
최대한 자연상태를 유지하면서 준설이라는 治水대책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