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6월19일 오늘의 역사, 대마도 정벌을 떠나다

윤의사 2025. 6. 19. 19:40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1419) (음)6월 19일 

이날 사시(巳時)에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해서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

 

라는 기사가 보인다.

태종 이후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안지방을 다니며 약탈을 일삼던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하여 세종 1년(1419) 이종무 장군이 1만 7천 명이 넘는 병사와 227척의 함선을 이끌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에 도착한 조선군은 왜구들의 지휘부와 배들을 불태우는 등 왜구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 원정을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 박위 장군이 정벌한 이후 세종과 상왕 태종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정벌전으로 다시는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조선의 뜻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특히 강온을 병행한 정책을 펼쳤다.

대마도주에게 조선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치도록 해 조선의 제후국이 되도록 했다.

1426년에는 부산포, 염포, 제포의 세 개 항구를 개항해 대마도 사람들이 무역을 하도록 허락하면서, 세견선이라는 무역선을 보내도록 했다. 이는 약탈 등의 해적행위를 방지하면서 정당하게 장사를 해 먹고살 수 있게 한 것이다.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해 대마도와의 무역을 통제하며 왜구들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했다. 

그러나 왜구는 대마도에만 있지 않고 일본 혼슈우 등에도 있었다. 이때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태였기에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해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한반도의 해안선이 길다보니 왜구가 침입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신무기의 개발, 조선에 귀순하는 왜인에게 관직이나 농토를 주어 정착하게 했으며, 외교적으로 조선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경우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 해안이나 해안 가까운 곳에 읍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다.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광교산 자락에 자리잡은 묘, 봉분을 ㄷ 자형으로 호석을 두른 것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