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 오늘의 역사,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은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혁명의 직접 원인은 3.15 부정선거에 따른 대구학생시위, 마산 의거와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희생, 4월 18일 고려대 학생 피습 사건 등으로 민심이 돌아섰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생활수준이 높아지니 '내 자식은 좋은 직장에서'라는 생각으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높은 교육열이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학생수가 3배로 증가하고, 한글을 모르는 비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로 떨어질 정도였다. 또한 1945년 대학생 숫자가 7천여명이었지만, 1960년대에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를 배척하기 위한 반공교육과 민주주의 교육도 혁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과 이승만 전대통령은 국민의 의식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대통령을 '아버지'라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해도 좋다'는 왕조시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하여 이승만 정권의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 4할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선거를 하면서 이정재와 같은 정치깡패를 동원한 정치인의 협박과 폭력이 이루어졌다.
높은 교육수준에 맞춰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화가 이루어져 농촌에서 얻는 정보보다 빠르게 정치와 경제 소식 등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의 무상경제원조에 의존하면서 정권을 연명하다 갑작스러운 미국의 개발 차관 기금에 의한 유상 차관 정책으로 전환하니 경제가 침체되면서 실업자의 대량 발생과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어들며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증가하였다.
혁명을 일으킨 다른 요인은 언론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였다. 언론의 부정적인 평가에 국민들도 정권교체를 열망하던 중에 3.15부정선거는 방아쇠를 당긴 격이다.
4월19일에만 13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4월 21일 내각총사퇴를 발표했으며, 미국의 중재로 4월26일 이승만 전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이어받은 민주당 정부는 구파와 신파의 대립 속에 대한민국을 제대로 이끌지못하며 혼란이 계속되자, 결국 박정희 전대통령이 군사를 동원하는 5.16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사진: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