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 7일 오늘의 역사, 경복궁에 흠경각 준공

윤의사 2025. 1. 7. 19:43

세종 20년(1438) 음 1월 7일, 경복궁에 옥루를 설치한 흠경각이 준공되었다.

위치는 경회루 북쪽, 세종 침전 옆이며 천추전 서쪽이었다. 우승지 김돈은 이 기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세종 20년 1월 7일 실록을 보면

 

'사람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고 털끝만큼 어긋남이 없으니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에서 보듯이 자동 시계가 완성된 것이다.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이 흠경각 제작자이다.

 '흠경(欽敬)'은 '하늘을 우러러 공경하며 백성에게 시간을 알려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뜻이다.

농업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농사를 짓는데 맞는 절기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했고 시간의 의미가 중요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절기와 시간을 나라에서 알아내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만든 관청이 '흠경각'이다.

흠경각에 설치된 옥루(자격루)는 조선이 낳은 천재 발명가인 장영실이 만들었다. 천문관측기인 혼천의와 기계시계 장치가 결합된 천문시계다. 시(時)·경(更)·점(點)을 모두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조선후기 이민철의 혼천의나 송이영의 혼천시계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장영실은 세종 3년(1421)에 명나라로 유학을 다녀와 물시계를 만들고, 5년이 지난 뒤 물시계 건물을 준공해 세종의 애민사상 중 하나를 실현하였다. 장영실은 이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장영실이  혼의(渾儀)·혼상(渾象)·규표(圭表)·간의(簡儀)와 자격루(自擊漏)·소간의(小簡儀)·앙부(仰釜)·천평(天平)·현주(懸珠)·일구(日晷), 물시계, 해시계 등을 만드니, 세종대왕이 치하한 말이 <연려실기술>에 나와있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

 

세종 19년(1437) 4월 15일 제작 보고된 별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로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 관측기구들은 경회루 옆 왕립 천문대인 간의대에 설치하고 운영했다. 간의대 또한 장영실이 만들었다.

그러나 4년 뒤 장영실은 세종 24년(1442) 3월 16일 실록에

 

 '대호군 장영실이 임금이 타는 가마 제작을 감독했는데, 견실하지 못해 부러졌으므로 의금부에서 국문했다.'

 

40여 일이 지난 뒤 사헌부에서 '불경(不敬)보다 더 큰 죄는 없다'며 처벌을 요청했다. 세종은 조사가 끝나고 보자고 답했다. 이틀 뒤인 4월 27일 의금부에서 '곤장 100대'를  구형했다. 세종은 20대를 감형했다. 하지만 대호군 조순생은 장영실에게 "부서질 리 없다"며 제작을 강행하자고 했지만 처벌하지 않았다. 6일 후 장영실에게 곤장형이 집행되고 장영실은 파직된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송나라에서 망명했다는 중국인 집안에다 노비 출신 어머니의 소생이라는 것, 이러한 사람이 과학이라는 첨단을 만드는 것을 지배층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숙종 39년(1713) 윤5월 15일 '승정원일기'를 보면

 

 '역법은 나라가 중히 여기는 바요 조종이 큰일로 여긴 바라, 지금 텅 빈 궁궐 안에는 간의대와 관상감과 옛 기기들이 있었으나 모두 폐기돼 쓸 수가 없다. 어디에 쓴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중국에서 배운 기술이라고도 하고 세종대왕이 지혜롭게 창조한 기술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 용법을 아무도 모르니 심히 애석하다(曆象之法 有國所重 祖宗朝則視爲大事 空闕內有簡儀臺 觀象監 亦有古圓器 廢而不用 未知用於某處 而似是或學於中國 或世宗大王 以睿智創造矣. 今則有器而不知所用 甚可惜也).'

 

文을 숭상한 조선이 퇴보한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산시에 있는 장영실 묘

 

장영실 사적비